전례박물관

 

한국천주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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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의 천주교 소개합니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전례박물관

1886년 프랑스와의 조약체결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거주와 활동이 보장되어 개항지를 중심으로 본당이 설정되고 교회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본당인 서울의 종현(오늘의 명동)본당은 대성당을 비롯하여 주교관, 수녀원, 인쇄소 등의 부속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종현에 이어 원산, 제물포, 부산, 마산포, 목포 등 개항지에 잇달아 본당이 설정되었으며, 점차 갓등이, 평양 등 주요한 교우촌과 도시에도 본당이 설립되었다. 또한 용산에 서양식 신학교 건물이 세워짐으로써 한국인 성직자 양성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시기에 복음은 남쪽으로는 제주도, 북쪽으로는 국경을 넘어 멀리 간도지방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은 지방당국과 잦은 마찰과 교민 사이의 분쟁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교안’(敎案)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한불조약 체결이후 교회의 시급한 과제는 한국인을 위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선교사를 위해서는 개항지 이외의 지역에서도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일이었다. 빈번한 교안의 발생으로 정부와 교회는 분쟁과 갈등과 같은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교민조약’(敎民條約)을 통해 어느 정도 합의점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5년 후 프랑스 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선교조약 (宣敎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지방 본당에서의 선교사들의 정착권(定着權)도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천주교에서 발간한<경향신문>(京鄕新聞)은 1906년 창간되어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기까지 4년간 지속되었다. 국권이 기울어져 가던 시기에 <경향신문>은 특히 내적 개화(內的開化)를 강조하면서 국민을 자강운동(自强運動)으로 계몽하고 인도하였다.

일제의 종교탄압은 해를 더할수록 노골화되었으며 <경향신문>은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폐간하였고, 이어 사범교육기관인 ‘숭신학교’(崇信學校)도 폐교 당하였다. 그 후 일제는 소위 ‘포교규칙’(布敎規則)을 제정하여 종교 활동을 제재하였고, 심지어 교회학교의 종교교육까지 금지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도 교구조직이 크게 발전하여 9개 교구로 증가하였고, 또 교구조직의 발전과 더불어 메리놀과 골룸반회 등 새 선교단체가 진출하였다. 그리고 1942년에는 노기남(盧基南) 주교가 서울교구장에 취임함으로써 최초의 한국인 교구장이 탄생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