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박물관

 

한국천주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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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사
박해를 소개합니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전례박물관

해한국천주교회는 수용 직후부터 정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어 근 백 년 동안 10여 회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를 겪었다. 최초의 박해는 1785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집회를 가지고 있을 때 관리들에게 검거됨으로써 일어났다[乙己秋曹摘發]. 체포된 신도들 가운데 김범우는 귀양을 가서 희생되었다. 그는 이 땅에서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조상제사를 거부했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 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신해박해]. 1795년의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에서 발단되었는데 윤유일(尹有一), 최인길, 지황 등이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였다[을묘박해].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는 순조(純祖)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신유박해이다.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집권층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일대 탄압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 박해는 신생교회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이 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고, 교회의 지도자인 신자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헌종(憲宗) 때 두 번째로 큰 박해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1839년의 기해박해이다. 이 박해로 당시 3명의 선교사(앵베르 주교, 모방과 샤스탕 신부)가 모두 순교하였고, 또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 교회의 요인들이 많이 순교하였다. 이 박해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한 이유로 조선정부의 천주교 탄압은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어 나아가게 되었다.

1846년의 박해(병오박해)는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체포가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 최초의 신부로 서품된 그는 서해안에서 선교사의 입국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1860년에 거듭된 박해(경신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에 고종(高宗)의 후견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대규모의 박해를 강행하였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는 약 10년간 계속되면서 병인양요,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신미양요 등으로 더욱 격화되기도 하였다.

박해로 말미암아 초기 교회를 주도했던 양반과 지식층이 물러나고, 점차 서민층으로 확산되면서 이들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처음에 주로 도시에 집중하고 있었던 신앙공동체들은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숨어 들어가 각 지역에 많은 교우촌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