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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의 천주교

성 김대건 안드레아신부 초상 (장발 作)

광복 이후의 천주교

민족의 해방과 완전한 종교의 자유는 천주교회에도 밝은 전망을 안겨주었다. 언론 출판분야에서 일간지 <경향신문>이 창간되는가 하면 일제시대에 폐간되었던 <경향잡지>와 <가톨릭 청년>이 속간되었다.


교육사업으로는 종래의 초등교육기관들이 중·고등 교육기관으로 개편되고 성직자 양성기관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가 ‘성신대학’(聖神大學) 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주교들은 국내 사회부조리의 제거가 조국통일을 위한 전제 조건임을 역설하면서 해방된 한국의 바른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토분단의 비극은 결과적으로 북한교회의 전멸을 가져왔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설립되면서부터 종교말살정책이 노골화되고 본격화되었다. 1949년 5월 마침내 천주교의 전멸작전이 전개되었으니 공산주의자들은 제일 먼저 덕원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습격하고 사우너(Sauer, 辛) 주교를 위시하여 수도원과 함경남북도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 신부, 수사, 수녀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평양교구장 홍용호(洪龍浩) 주교는 이에 항의하고 나섰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홍주교를 시작으로 평양 시내와 평안남북도 의 한국인 신부들을 모조리 체포하였다. 황해도와 강원도 지방에 남아 있던 신부들도 6.25를 전후하여 모두 체포됨으로써 북한에는 한명의 신부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남한의 천주교는 한국전쟁(1950∼1953년)의 시련 속에서도 발전을 멈추지 않았으며 특히 휴전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1962년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장이 열린 해이다. 왜냐하면 이 해에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었고, 또한 같은 해 개최된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교회의 쇄신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교계제도의 설정에 이어 한국교회의 제도적 발전은 1969년 서울 대교구장 김수환(金壽煥) 대주교가 추기경에 서임됨으로써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