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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신부 초상 (장발 作)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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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구분 전례박물관 정리번호 030105A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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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문 유물 교구/소속 서울대교구
관리/소장처 가톨릭 문화시설 종별 제구류

필수항목

필수항목
명칭(한글) 주교용 촛대 명칭(영문) candlestick(영)
장르 제구류 등록번호 1157
국적 대한민국 시대
용도 기능
수량1 1 01 재질1 금속 복합금속
수량2 재질2
수량3 재질3
필수항목
크기 높이
(세로)
9 (cm) 길이
(가로)
(cm) 너비
(폭)
28 (cm)
깊이 (cm) 지름 (cm) 기타 (cm)
문화재지정
문화재지정 구분 호수 일자
     
특징
특징 금속으로 제작된 촛대/
초받침, 손잡이, 받침 부분으로 구성/
초받침은 작은 단지 형태/
받침 부분은 둥근 접시 형태이며 가장자리 부분에 음각기법으로 이중의 원문을 둘러 장식/
받침대의 한쪽 옆에 길게 부착된 손잡이에 천사의 얼굴과 두마리의 뱀 나뭇잎 등이 양각으로 장식/

세부항목

세부항목
정의 초를 세우고 불을 켜는 등구(燈具)의 총칭.
유래 및
발달과정/역사
봉헌 때에 사용하는 초라든지 망자를 위해서 쓰이는 초처럼 초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금세기 초에 제대 위에 초를 놓아두기 시작했고 비록 빛을 발하는 기능이 약하고 그것이 더 이상 별로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나 계속 그 곳에 두게 되었다. 초는 대축일이 거행되는 시기라든지, 전례의식을 거행하는 데 있어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 부활절, 예수성탄, 세례, 그리고 첫 영성체 때 그러하다. 이것으로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며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등불이자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촛대에는 가동식(可動式)과 고정식이 있다. 서양에서는 밀랍이 일찍부터 이집트인 ?그리스인에 알려져 BC 3세기에는 초가 있었다고 하므로 촛대도 그리스시대 말기에 발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시대에도 수는 적었으나 촛대가 있었음이 확실하며, 황제 티투스의 개선문에 부조된 7개의 촛대나 폼페이의 유물 등에서 당시의 촛대를 알 수 있다. 구조는 지주(支柱) 끝에 몇 개의 부리 모양의 가지가 있는 촛대, 잔대(盞臺) 중앙에 못이 있는 촛대, 초를 그대로 끼울 수 있는 통형(筒形)의 촛대 외에, 나부(裸婦)나 장사를 본뜬 장식적인 촛대도 있는데, 모두 청동으로 되어 있다. 초를 많이 사용한 것은 중세 촛대를 사용하였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초를 여러 개 켜는 다등가(多燈架)도 있었고, 대리석제 대형 촛대도 있었다. 17∼18세기부터 궁정 등에서는 은으로 만든 촛대를 사용하였으나 도자기 ?청동제의 촛대도 제작되어, 실내장식의 역할도 하였다.
일반적 형태 최대길이 28cm, 높이 9cm
본 소장품은 김수환 추기경이 사용했던 촛대이다. 금속으로 제작되었으며 초받침, 손잡이, 받침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받침은 작은 단지 형태이다. 받침 부분은 둥근 접시 형태이며 가장자리 부분에 음각기법으로 이중의 원문을 둘러 장식했다. 받침대의 한쪽 옆에 길게 부착된 손잡이에 천사의 얼굴과 두마리의 뱀 나뭇잎 등이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교회사적의의
참고자료 『한국가톨릭대사전(신)』,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9.
『한국가톨릭용어큰사전』, 허종진, 한국그리스도교언어연구소, 1994.
『그리스도교의 상징들』, 김종익, 가톨릭출판사, 2001.
비고 <참고>
김수환(金壽煥) 추기경(1922~)
서울대교구장. 세례명은 스데파노. 본관은 광산(光山). 김동한(金東漢, 가오르) 신부의 아우. 경북 대구 남산동에서 김영석(金永錫, 요셉)과 서중하(徐仲夏, 마르티나)의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조부 때부터인데, 조부인 김보현(金甫鉉,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때 충남 논산군 연산(連山)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姜末孫)도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임신한 몸이었으므로 석방되어 영석을 낳게 되었으며, 영석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하여 옹기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 대구에서 정착하였다. 김수환은 이후 부친을 따라 군위(軍威)로 이주,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를 거쳐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오찌 대학(上智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1944년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동경 남쪽 후시마(父島)에서 훈련을 받던 중 종전(終戰)을 맞고 조오찌대학에 복학했다. 그리고 1947년, 해방을 맞이한 조국으로 돌아와 성신대학(가톨릭 대학의 전신)에 편입, 4년 후인 1951년 9월 15일 대구에서 서품되었다.
이후 1970년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 위원장, 주교 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 위원장, 주교 회의 산하 여러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역임했으며, 국내외의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울러 그 동안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 시성 운동, 해외 선교 사업,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행사, 서울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등을 통해 한국 교회를 국내외에 드러내는 데 많은 역할을 하여 교세를 확대시켰다.
한편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는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동시에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이후 정치 현실과 노동문제에 대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인권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김 추기경의 사회 교리에 대한 의식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제3공화국 이래 현재까지 정치권력에 의해 많은 고난과 희생을 받아 왔지만, 그 희생과 고난의 대가로 교회의 지위가 대내외적으로 크게 격상되었고,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한 발판도 다지게 되었다.
소장처 주소
및 정보
110-758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90-1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신관
예약 관람 TEL (02)740-9707~8

유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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