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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전통으로 빛나는 신학의 전당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선교자 입국로를 개착하는 임무 수행 중 6월 5일 체포되어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60년 7월 5일에 혜화동 대신학교로 옮겨져 안치된 후 현재에 이른다.

가톨릭대학교 소장 유물

시신을 담았던 관

1901년 5월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미리내에서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현성심여고 자리)로 이장하면서 사용했던 관.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그해 10월 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으며, 그 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용산성직자묘지에 잠시 가매장되었다가 9월 28일 경상남도 밀양으로 옮겨졌으며, 1951년 서울 수복 후 혜화동 소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져 모셔졌다.

그리고 1960년 7월 5일에 다시 대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 관은 1994년 2월 24일까지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담아 보관하는데 사용되었다.

묘비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용산으로 옮겨진 후 약 8개월 후인 1902년 6월 23일에 제8대 조선 교구장인 뮈텔(G.C.M.Mutel, 1854-1933) 주교와 신학교 교장인 기낭(P.Guinand, 1872-1944) 신부가 성당에 모셔진 성인의 유해를 더 공고히 하는 작업을 한 후, 영구적으로 봉인하기 위해 유해 위에 덮었던 대리석판. 아래의 숫자는 김대건 신부의 생몰연도이다.

그리고 AK는 ‘안드레아 김대건’의 라틴어 첫 머리글자만을 적어 놓은 것이다. 이 대리석판은 1994년 2월 24일 새로운 형태의 것으로 대체되었다



유해 안치 석관

서울 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 강 마티아 수녀에 의해 설계, 제작된 석관으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당의 제대 우측에 설치되어 있다. 1994년 2월 서울대교구 강우일 보좌주교의 입회 아래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개봉한 후, 영구보존을 위해 약물처리를 하고 포장작업을 하였으며, 김수환 추기경의 추인으로 납관에 밀봉을 하였고, 2월 24일에 새로 제작된 석관에 안치하였다.

위는 성체를 모시는 감실이고, 가운데는 김대건 신부의 두개골(전두골, 협골, 상악골)이 안치된 부분이며, 약력이 적힌 맨 아래의 대리석 뒤에 김대건 신부의 남은 유해들이 안치되어 있다.

흉상

본 김대건 신부 흉상은 신부님 유해 중 머리뼈의 각 부분에 대한 측정자료와 턱뼈 정밀촬영자료를 활용하여, 신부님의 얼굴을 생전의 모습에 가깝도록 복원한 것이다. 복원작업에는 가톨릭의대 해부학과를 주축으로 건국의대, 연세의대, 울산의대 등 의대 팀과 한국과학기술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이 참여하였으며 복원된 흉상은 조각가 구본조씨가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