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 형태 |
가로 62cm, 세로 62cm, 높이 3cm
본 소장품은 자색 사직으로 제작되었다. 정사각형의 형태이며, 안에 솜을 풍성하게 넣었다. 방석의 윗면에 은사로 '착좌 기념', '1968년 5월 29일'이라는 명문과 '주교관', '주교 십자가', '지팡이', '종려가지' 등의 문양이 수놓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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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적의의 |
김수환 추기경의 세례명은 스테파노,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김동한(金東漢, 가오르) 신부의 아우이다. 경북 대구 남산동에서 김영석(金永錫, 요셉)과 서중하(徐仲夏, 마르티나)의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조부 때부터인데, 조부인 김보현(金甫鉉,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때 충남 논산군 연산(連山)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조모인 강말손(姜末孫)도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임신한 몸이었으므로 석방되어 영석을 낳게 되었으며, 영석은 성장한 뒤 영남 지방으로 이주하여 옹기장사를 하다가 혼인한 뒤 대구에서 정착하였다. 김수환은 이후 부친을 따라 군위(軍威)로 이주,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를 거쳐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오찌 대학(上智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1944년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동경 남쪽 후시마(父島)에서 훈련을 받던 중 종전(終戰)을 맞고 조오찌대학에 복학했다. 그리고 1947년, 해방을 맞이한 조국으로 돌아와 성신대학(가톨릭 대학의 전신)에 편입, 4년 후인 1951년 9월 15일 대구에서 서품되었다.
이후 1970년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 위원장, 주교 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 위원장, 주교 회의 산하 여러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역임했으며, 국내외의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울러 그 동안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 시성 운동, 해외 선교 사업,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행사, 서울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등을 통해 한국 교회를 국내외에 드러내는 데 많은 역할을 하여 교세를 확대시켰다.
한편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는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동시에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이후 정치 현실과 노동문제에 대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인권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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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한국가톨릭용어큰사전』, 허종진, 한국그리스도교언어연구소, 1994.
『그리스도의 상징들』, 김종익, 가톨릭출판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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