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는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 등과 더불어 신앙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정식으로 수용되었다. 이 공동체는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였으며, 그 해 9월(음)부터 신앙을 받아 들이는 이웃들에게 세례를 주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공동체가 탄생하였다.
초기 교회에서 특히 이벽(李檗)은 정약전(丁若田), 정약용(丁若鏞), 권철신(權哲身)과 권일신(權日身)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새로 태어난 교회의 중심 인물이 되어 교회의 정착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 교회 지도자들은 1786년부터 자신들끼리 성사를 집행하기도 하였다.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 불리는 이들의 성사집행은 서적을 통한 신앙의 수용과 실천과정에서 잘못 이해한 결과였다. 그러나 성사집행을 해 나가는 동안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성사집행의 행위들의 문제점을 파악하게 되었고,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이에 관해 문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선교사들은 즉시 성사집행의 행위를 금지하는 한편, 선교사의 파견을 약속하게 되였다. 아울러 교회에서 조상제사도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de Giuvea, 揚士選) 는 약속대로 선교사를 파견하였으며, 1794년 말 중국인 주문모 (周文謨) 신부의 입국으로 이어졌다. 주신부의 노력과 신자들의 선교활동에 힘입어 교회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성주요한 신자들은 명도회(明道會)란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교리를 익히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種)이었다. 그는 신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주교요지》란 순 한글로 된 교리서를 손수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1년의 박해는 교회를 거의 폐허화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를 위시하여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도 거의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박해 이후 무너진 교회의 재건에 힘쓴 당시의 신자 중에는 정하상 (丁夏祥), 신태보(申太甫) 등이 있었고 그 후 유진길(劉進吉)과 조신철(趙信喆) 등이 이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북경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에 대한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으며, 교황에게도 1811년과 1825년경 두 차례의 서한을 보냈다. 신자들의 이러한 노력에 로마 성청에서는 조선에 교구를 설정하고 그것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여 지속적인 선교사의 파견을 보장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Bruguiere,蘇) 주교는 조선입국을 서둘렀으나 그의 임지를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다. 1837년에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范世亨) 주교가 입국하였다.이로써 북경교구로부터 조선교구의 독립이 실현되었고, 동시에 조선교회는 교황청 및 파리 외방전교회와 대외적인 관계를 맺고,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그 장래가 완전히 보장되기에 이르렀다.